맷 경 버스비

맷 경버스비

잉글랜드 축구사에 길이 남을 위대한 지도자 중 한명인 버스비 경은 스코틀랜드 라나크셔의 오르비스턴에서 1909년 5월 26일 태어났다.

버스비는 맨체스터 시티와 리버풀에서 선수생활을 했다. 그는 전쟁이 끝나고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를 맡은 첫 감독이 됐다. 공군 복무를 마친 버스비 경은 1954년 10월 팀에 합류했다.

버스비은 폭격으로 파괴된 경기장과 15,000 파운드(약 3000만원)의 빚을 가지고 있는 팀을 책임지게 된 것이다. 그는 먼저 지미 머피를 코치로 영입한다. 머피는 1971년까지 팀에 남아 버스비경을 도왔다. 그들은 유나이티드의 전후 1세대 드림팀을 만들었다.

유나이티드는 1948년 FA컵 결승전에서 블랙풀을 4-2로 꺾고 우승컵을 차지했다. 이후 네 번의 준우승을 차지한 유나이티드는 1952년 드디어 리그 챔피언십 우승컵을 차지했다.

 1953년부터 버스비와 머피는 클럽의 스카우트 시스템을 강화시켰다. 새로 영입된 빌 풀케스, 마크 존스, 데이비드 페그, 리앙 웰란, 이디 콜먼, 던컨 에드워드가 팀의 성공시대를 이끌었다. 젊은 선수들은 리그에서 성공가도를 달렸고, 이들은 ‘버스비의 아이들’이란 별명을 얻었다. 버스비의 아이들은 1956년과 1957년 리그 우승을 차지했고, 1957년 FA컵 결승전에 진출했다.

리그 성공에도 불구하고 버스비는 더 큰 미래를 바라봤다. 유나이티드는 56/57시즌 유러피언컵에서 4강에서 우승을 차지한 레알 마드리드에게 패배했다.

다음시즌인 57/58시즌, 도전에 대한 열망으로 가득 찬 유나이티드는 2월 모든 대회에서 선전하고 있었다. 하지만, 1958년 2월 6일 최악의 비행기 사고가 터졌다. 레드스타 베오그라드와의 원정경기를 마치고 귀국하던 도중 사고를 당한 것. 뮌헨에서 연료를 충전한 직후 이륙하다 공항 벽에 부딪히며 비행기가 산산 조각나고 말았다. 21명의 사람들이 죽었다. 그 중에는 8명의 선수들과 3명의 구단 직원들이 있었다.

버스비도 거의 죽음에 직면했었다. 그는 독일 병원에 누워있으면서 두 번의 임종선고를 받기도 했다. 하지만, 그는 다행히도 사고 71일만에 맨체스터로 돌아왔다.

1958년 8월부터 다시 지휘봉을 잡은 버스비는 새로운 선수들을 영입하며 팀을 재건하기 시작했다. 새로운 선수들은 1963년 FA컵 결승전에서 레스터 시티를 3-1로 격파하며 뮌헨참사 이후 첫 우승컵을 차지했다.

유나이티드는 이어 1965년과 1967년 리그 타이틀을 차지했고, 버스비는 다음 시즌 유럽을 제패할 기회를 얻었다. 65/66시즌 유나이티드는 준결승에 진출했다. 유나이티드는 이미 56/57. 57/58시즌에 준결승에 진출했었지만 결승진출에는 실패했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그들은 웸블리에서 벤피카와 결승전을 치르게 됐다.

유나이티드는 벤피카에 4-1로 대승하며 유러피언 컵을 안았다. 우승컵은 뮌헨 참사에서 희생된 이들의 10주기와 위대한 버스비에게 바쳐졌다.

버스비는 68/69 시즌을 끝으로 은퇴하고, 총 감독직에 올랐다. 윌프 맥기네스가 감독직을 맡았다. 이 체제는 1970년 12월 28일까지 지속됐고, 이후 버스비가 다시 감독으로 추대됐다.버스비는 1958년에 잉글랜드 지도자 상을 받았고, 1968년에는 유러피언 컵 우승으로 올해의 감독상과 기사작위를 수여 받았다.

그는 1972년 교황에게 세인트 그레고리 중급 훈작사를 수여받았다. 버스비는 1980년 유나이티드의 회장 자리에 올랐고, 1982년에는 잉글랜드 축구협회의 부회장을 맡으며 종신 회원이 됐다. 1993년, 올드 프라포드 앞에 이르는 ‘워윅 로드 노스’는 ‘미스터 맨체스터’라는 별명을 얻은 버스비의 이름을 따 ‘맷 버스비 로드’로 개명됐다.

버스비 경은 1994년 1월 20일 세상을 떠났다. 그의 장례식이 치러진 일주일 후 맨체스터 그의 잡았에는 수천명이 운집했다. 그의 장례 행렬은 올드 트라포드를 지나 맨체스터 남부 묘지로 향했다.버스비 경이 사망한 지 5년 후, 새로운 유나이티드의 선수들은 유러피언 컵을 제패했다. 그날은 버스비 경이 탄생 90주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