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스비의 아이들의 탄생

버스비의 아이들의 탄생

로저 바인은 최초로 "버스비의 아이들"이라는 별명을 얻은 두 선수 중 한명 이었다. 또 한명은 재키 블랜치 플라워였다. 이 둘은 1951/52시즌에 나란히 데뷔했다.

도전의 측면에서 1945년에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감독직을 맡는 것은 맨발로 에베레스트 산을 오르는 것과 같아보였다.

1930년대에 클럽은 두번이나 1부 리그에서 강등당했고 거의 파산 지경이었다. 게다가 세계 2차대전 중이던 1941년에 루프트바페(나치 독일의 공군)이 올드 트래포드를 폭격했고 이로 인해 유나이티드는 지역 라이벌 맨체스터 시티의 홈구장인 메인 로드에서 홈 경기를 치뤄야만 했다.

하지만 그런 문제들은 1945년 2월 19일 유나이티드의 지휘봉을 잡은 맷 버스비 감독에게는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버스비에게는 빛나는 비전이 있었다. 그는 폭격으로 파괴된 경기장에서 아름다움을 보았으며 그런 불씨에서 불사조를 만들어 낼 수 있는 기회를 보았다.

스코틀랜드의 라나르크셔의 석탄 채광지인 벨실 출신의 버스비는 열심히 노력하는 것의 가치를 알고 있었으며 정직한 노력이 이뤄낼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 결정적으로 그는 맨체스터 시티가 1934년 FA 컵 우승을 거둘 때 시티의 선수였기 때문에 맨체스터와 맨체스터 사람들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가 유나이티드와 보여주었던 파트너십은 영국 축구계에 돌이킬 수 없을만큼 큰 변화를 가져다 주었다.

버스비를 맨유의 감독으로 영입하는데 도움을 준 것은 기업가 루이스 로카였다. 올드 트래포드의 감독직을 맡아달라는 로카의 편지는 버스비에게 전달되는데 한달이나 걸렸다. 리버풀은 전쟁 이후 버스비가 플레잉 코치로 돌아오길 바랬다. 하지만 버스비는 미래를 설계하길 바랬고 그가 해냈던 것을 스스로 이뤄 내고 싶었다. 그는 어린 선수들과 가벼운 발놀림을 가지고 있는 선수, 그리고 그의 상상속에 있는 이상적인 선수, 그의 비전을 보여줄 수 있는 선수를 데려옴으로써 미래를 그려나기기를 원했다.

그는 어린 선수들이 유나이티드의 성공 뿐만 아니라 축구계의 미래를 이끌어 나갈 열쇠를 쥐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클럽의 대변인으로 남은 그의 전임자 월터 크릭머와 같은 목표를 가지고 있었다. 크릭머의 지휘 아래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주니어 에슬레틱 클럽(MUJACs)가 1938년에 설립되었는데 바로 여기서 버스비 제국을 이끌어 나갈 씨앗들이 발견되었다. 그는 올드 트래포드에서 버스로 두정거장 거리에 사무실을 열었다. "그 작은 사무실에는 꿈을 꿀 공간도 시간도 충분하지 않았지만 나는 꿈을 꾸었다." 라고 버스비는 말했다.

버스비는 빠른 시간 내에 도와줄 사람을 선임하였는데 그는 "아일랜드 사람의 이름을 가지고 있으며 활기넘치는 웨일즈 출신의 피아노 연주자이고 목소리는 시멘트 믹서기만큼 걸걸한" 그의 오랜 전우 지미 머피였다. 머피는 리저브 팀을 맡았고 유스 팀에 특별한 관심을 쏟았다. 베테랑 톰 커리와 빌 잉글리스 그리고 아더 파월과 함께 구성된 코칭 스태프는 2년 뒤 베르트 월리가 새로 합류하면서 완성되었다. 버스비는 "나는 나의 스태프들에게 우리가 높은 곳을 목표로 날 것이라고 이야기 했다." 라고 말했다.

버스비는 취임한지 2년 만에 버스비의 개혁과 경험에서 나오는 팀 지도력을 과시하며 40년만에 유나이티드에게 첫 우승을 안겨주었다. 1948년 FA 컵에서 공격적인 축구를 선사하며 전설적인 잉글랜드 출신의 선수 스탠리 매튜스가 활약하는 블랙풀을 상대로 우승을 거두었다.

변화가 필요하다는 것을 알아챈 버스비는 장인과 같은 솜씨로 팀을 개편해나갔다. 새로운 선수들이 영입되고 기존 선수들이 팀을 떠나면서 그는 승리를 거둘수 있는 팀 조합을 만들고자 노력했고 그 이면엔 유스로부터 올라오는 젊은 피의 성장도 한몫 했다. 그로부터 2년 가량 시간이 지난 뒤 유나이티드는 1952년 리그 우승을 차지했다. 하지만 팀은 나이가 들고 있었고 버스비가 드디어 어리고 맨체스터에서 훈련받은 선수들을 그의 성인 팀 명단에 올려놓을 때가 왔다.

1952/53 시즌과 1953/54 시즌에 걸쳐 버스비 베이브는 꽃을 피우기 시작했다. 로저 브린은 1951/52 시즌 후반에 측면에서 좋은 활약을 펼쳤고 나중에는 주전 풀백의 자리를 차지했다. 재키 블랜치플라워는 브린과 함께 뛰며 "베이브"라고 불린 첫번째 선수가 되었다. 그는 1952년 우승 당시에 역시 몇번 출장한 경험이 있는 마크 존스와 짝을 이룬 이후 더 많은 출장을 기록했다.

다음에는 에디 콜먼과 17세의 나이에 1군 경기에 데뷔하며 성인의 몸을 가진 소년이라 불렸던 던컨 에드워즈가 합류하면서 "버스비 베이브"가 완성되었다.

버스비 아이들의 등장

버스비의 모든 선수들이 버스비가 직접 길러낸 ‘버스비의 아이들’은 아니다. 1953년 3월, 그는 반즐리에서 29,999파운드에 센터 포워드인 토미 테일러와 계약을 마쳤다. 토미 테일러는 데니스 바이올렛과 함께 뛴 1955/56시즌 두 사람이 함께 뛴 27게임에서 21골을 득점할 만큼 강력한 파트너십을 형성하였다.

1956년 4월 7일 토요일, 버스비의 아이들이 1948년 FA컵 첫 트로피를 안겼을 때 이긴적이 있는 블랙플과의 경기를 다시 치르며 맨유는 타이틀에서 점점 멀어져갔다. 당시 맨유의 평균 연령은 고작 22살 이었다.

1955/56시즌, 타이틀을 얻기 위해 버스비가 쏟은 노력은 빛이 나지 않았다.물론 버스비는 국내 제패에 만족하지 않았다.: 그는 유로피안 컵의 형태에 맞는 새로운 실험 찾으려 했다. 예선전에서 2-0으로 이긴 원정 이후 유나이티드는 벨기에의 안더레흐트를 10-0으로 눌렀다. 그 결과는 유나이티드에게 큰 승리를 안겨줬다. 보루시아 도르트문트와 아틀레틱 빌바오 역시 맨유의 상대가 대지 않았다.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는 레알 마드리드를 상대로 5-3 승리를 거두며 준결승에 진출했다.

홈에서 맨유는 거침없는 행보를 보였다. 활발하고 희망에찬 젊은 바비 찰튼은 그의 데뷔 무대인 찰튼 에슬레틱과의 경기에서 두 골을 기록했다. 맨유는 5번 연속으로 FA컵 유스컵 트로피를 차지했다.

리그 타이틀은 테일러와 바이올렛이 다시 한번 뛰어난 활약을 보임으로서 유지할 수 있었다. 하지만 가장 많은 득점을 한 것은 26골을 넣은 아일랜드의 리암 휄란이었다. 이로서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는 그 누구도 이길 수 없는 강팀이 되었다. 아스턴 빌라는 홈에서 맨유를 상대로 껄끄러운  2-1 승리를 거두며 맨유의 FA컵 더블 달성을 막았다. 아스턴 빌라의 골을 성공시킨 피터 맥팔랜드는 악했다. 그는 골키퍼 레이우드를 상대로 강한 몸싸움을 벌였고, 그 결과 레이우드의 광대뼈가 부러지기도 했다.

많은 어려움이 있었지만, 하늘은 맨유의 편이었다.  팬들의 기대는 높아져 3연속 타이틀에 대한 기대와 유럽 타이틀에 대한 기대로 바뀌었다. 버스비는 헤리 그렉을 원했고, 당시 골키퍼 계약 최고액을 갱신하는 금액으로 그를 영입하며 팀을 키워나갔다.

당시 시즌에서 맨유는 이전 두 시즌 만큼이나 충분한 성적을 내지 못했다. 맨유의 2월은 아스널과의 원정경기에서 시작되었다. 정말 흥미진진했던 당시 경기에서 맨유는 아스널을 5-4로 제압핬다. 이는 준준결승에서 만날 레드스타 베오그라드를 만나기 앞서 상대의 기를 꺾을 수 있는 좋은 촉매제가 되기도 했다.

당시의 끔찍한 이야기 보기 : 살아남은 자의 이야기: 보비 찰턴 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