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토니오 발렌시아

발렌시아의 마지막 편지

월요일 13 5월 2019 08:15

누군가 나에게 말해주었다면, 에콰도르의 아이였을 때, 내가 맨유 선수로 10년을 보내게 될 거라고 말해주었다면, 불가능한 일이었다고 말했을 수 있다.

부모님, 여섯 남매와 함께 자란 나는 라고 아그리오에 있는 나무로 만든 집에서 살았다. 아주 검소하게 말이다. 즐거움이 가득했지만, 현실은 다르다는 걸 알고 있었다. 꽤나 어려웠던 어린 시절이었다. 아버지와 여섯 남매가 음식과 집으로 힘든 시간을 보냈습니다. 어머니도 정말 힘드셨고요. 음식과 교육 문제에 있어서 말이죠.

가족과 고향은 힘든 사람들이 많은 곳이었습니다. 기름 산업 때문이었는데요. 항상 일을 하셨습니다. 제 형제들도 그랬고요. 재정적으로도 집을 돕기 위해 제 다른 형제들은 병을 주웠습니다. 저도 파이터였습니다. 

작은 마을에 살면 필요한 일입니다. 약간 슬펐던 시기일 수도 있었고 모든 이들이 힘들게 살았습니다. 우리도 그랬고요. 매일을 그래서 더 열심히 살았습니다. 쉽지 않았고요. 

나쁜 것만은 아니었습니다. 행복했고 즐거운 순간도 있었어요. 5:5로 갈리면서 더 말이죠. 반은 행복했고 반은 슬펐습니다. 하지만 그게 인생이잖아요! 아무도 같은 운을 타고나지는 않으니까요. 

어느 누구도 큰 축구 경기장에서 운을 충분히 가지고 있진 않습니다. 저처럼요. 

라고 아그리오는 로컬 팀인데요, 그곳에서 그들의 경기를 치렀습니다. 우리가 항상 가서 볼 수 있을 뿐 아니라 경기장에 언제든 가서 뛸 수도 있었어요. 매일 오후 시간만 되면 우리는 거기에 있었고 큰 경기장에서 작은 사이드의 경기들을 했습니다. 우린 10시 11시까지 놀았어요. 대부분의 시간을 불이 꺼질 때까지 경기로 뛰었고, 엄마가 우릴 집으로 데려오시곤 했죠.

축구를 많이 했었고, 감사하게도요, 경기 안에서 커리어를 만들 기회도 얻었습니다.

카베자라고 부르는 제 친구들에게 감사한 마음을 전합니다. 

14살이 되었을 때, 에콰도르에서 가장 큰 클럽 중 하나인 나시오날에 가고 싶었습니다. 나시오날은 키토에 기반을 두고 있는 팀입니다. 카베자는 저를 안심시켜주었고, 갈 수 있을 거라 응원해주었어요. 제 첫 시험은 U16이었습니다. 세 번의 세션 이후 코치가 저를 데려가겠다는 결정을 내렸습니다. 제 키트를 모두 챙겨주셨고, 다른 어린 선수들과 함께 지냈습니다. 제 커리어가 시작된 곳이죠.

맨유에 대해 더 알게 된 계기가 되기도 했습니다. 그들을 보기 시작했거든요. 라틴 아메리카의 존재 때문이죠. 베론과 포를란 같은 선수들이요. 그래서 맨유의 전진을 더 많이 보게 되었고, 우승하는 모습도 보았습니다. 클럽의 모든 것에 대해 잘 알기 시작했습니다. 

축구를 시작하며 저는 국가대표 선수로, 프로 선수가 되고 싶었고, 에콰도르 국가대표 팀에 가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두 번의 득점을 기록한 이후 유럽에서 뛸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후 스페인을 통해 위건에서 마무리한 이후 제 목표는 열심히 하는 것 뿐이었고, 이후 맨유처럼 큰 클럽에서 뛰고 싶었습니다. 

이후 일어난 일은, 제가 맨유에 합류하게 되고는 제 스스로 말할 수 있어요. 

이 곳이 나의 클럽입니다. 

이 곳이 나의 집입니다.

이 곳에서 오래 있고 싶습니다.

그리고나서 훈련을 시작했고 최선을 다했습니다. 최고의 선수들과 함께하며 제 스스로 2년 이상 있게 될거라고 생각지도 못했습니다!

클럽에서 보낸 초반에는 에드윈 반 데 사르가 저를 앉혀두고 이렇게 말해주기도 했습니다. "여기가 맨유이고, 우리가 플레이하는 방식이야. 이기거나 지거나. 계속해서 훈련하고 일해야한다. 이기고자하는 멘탈로 이루어진 팀이야."

이후 우리의 코치 무렌스틴도 이렇게 말해주었습니다. "이 것이 맨유고 열심히 해야한다. 이겨야 해. 이것이 우승하는 클럽이다."

그리고 제 스스로에게 이렇게 말했죠. "이 모습이 좋다. 훈련도 해야하고 열심히 임해야 한다."

제가 말했던 것처럼, 인생을 걸고 파이터가 되었습니다. 

제 가족들은 라고 아그리오에서 싸웠습니다. 그리고 저는 나시오날에서, 훈련장에서 싸웠습니다. 제 스스로 10대로서 돈을 벌기 위해서 말이죠.

파이팅은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제가 그랬습니다. 계속해서 일하고, 훈련하고요. 매일 매 경기에서 항상 실력을 향상시키고자 했습니다. 점진적으로 클럽에서의 삶에 적응해 갔습니다.

"여기 좀 더 있을 게획이고, 또 다른 계약을 하도록 만들어야겠다!"

여기 제가 있습니다. 거의 10년을 보냈고, 이곳에서 많은 기억을 갖게 되었죠. 이 팀에서 이뤄낸 모든 우승을 생각할 거고, 훌륭했던 경기들을 생각하게 될 거빈다. 제 가슴에서도 머리에서도 절대 잊혀지지 않을 겁니다.

이상할 수도 있지만, 한 경기가 제 기억 속에 남아있습니다. 바이에른 뮌헨과의 챔피언스리그 경기입니다. 올드 트래포드에서 뛴 첫 시즌이었고 1차전에서 2-1로 패배했습니다.나아가서 이길 거란 걸 알고 있었지만 드레싱 룸에서의 분위기는 고무되어 있었습니다. 경기 자체에 말이죠. 

리오와 패트리스가 우릴 격려해주었던 생각이 납니다. "우린 이번 경기에서 팬과 가족들을 위해 이길 거다" 긜고 나서 우린 40분을 경기 후 보냈고, 워밍 업과 준비를 했습니다. 이후 경기장으로 나갔고 둘러본 후 집중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10��� 내로 2-0의 스코어를, 하프 타임 전에 3-0의 스코어를 만들었습니다. 두 번의 어시스트를 만들었고 최고의 경기 중 하나였습니다. 팀 전체가 엄청났고 놀라운 분위기였습니다. 우린 경기 중 끝을 놓지 않았습니다. 바이에른이 두 점을 냈기 때문이었죠. 하지만 여전히 그 경기가 항상 가슴에 남습니다.

물론 우린 항상 이기진 않았습니다. 항상 수월하지도 않았죠. 힘들었고 어려운 기억도 있습니다. 하지만 모두 긍정적으로 남았습니다. 

두 번째 시즌에서는 레인저스와의 챔피언스리그 경기에서 다리 부상을 입었습니다. 심각했죠.

수술을 했었고, 이틀 후 병원에서 퇴원해서 집에서 휴식을 취했습니다.

도어벨이 울렸습니다. 

제 파트너가 문을 열었고 퍼거슨 경이 있었고 제게 걱정 말라는 이야기를 전해주었습니다. 

차분히 회복에만 집중하라는 말이었죠. 

우린 너를 기다릴거라고요. 

저에게는 정말 중요한 응원이었습니다. 

6개월 후 챔피언스리그 결승에서 뛸 수 있었습니다. 

힘들게 임했습니다. 하지만 존 다빈에게 감사합니다. 의사 선생님이 정말 잘해주었습니다. 우린 회복과 훈련 계획을 받았습니다. 함께 회복에 임했고 경기장 밖으로 나가기 전까지 훈련했습니다. 

6개월은 정말 힘들었지만 멋진 시간이었습니다. 존만이 아니라 말이죠. 아주 많은 다른 사람들도 알게 되었습니다. 매일 팀과 함께 식사를 했고, 모든 이들을 알게 되었습니다. 체프와 주방 스탭들까지요. 

저녁 5~6시 정도까지 훈련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9시면 출근했고요. 제 스스로 여느 회사원과 다름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좋은 우정도 쌓았습니다. 그 점에서 약간은 슬픕니다. 떠난다는 것이 말이죠. 하지만 제 가슴은 항상 이들을 기억할 겁니다.

선수들도 잊지 못할 겁니다. 긱스, 루니, 스콜스, 리오, 비디치, 파트리스... 이 이름들을 리스트 업 하는 것도 믿기 어려운 일이죠. 이들을 모두 호명하는 건 불가능 합니다. 최고로 똑똑한 축구 선수들과 함께 하게 되어 정말 행복했습니다. 

여러 기억이 많습니다. 그리고 다른 것들도요. 솔직히 맨유 박물관이 집 같습니다! 이곳에서 정말 가치있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제 삶을 펼쳐준 곳이고 모든 노력을 쏟아부은 곳입니다. 돈 만이 아니라 기억들까지 말이죠. 

두 가지 가장 좋아하는 아이템이 있는데요. 제 유니폼과 완장입니다. 무리뉴 감독님께서 처음으로 주장의 자리를 주셨죠. 

이런 것들과 기억들, 이들이 곧장 가치있는 것들입니다. 

제 가슴, 제 애정은 항상 맨유에 있을 겁니다. 항상 팬으로 남을거고요. 하지만 항상 제 대정을 클럽의, 시티의 모든 이들과 함께 할 겁니다. 제 딸도 10번째 맨체스터에서의 삶을 즐거워하고 있습니다. 멋진 가정이 되었죠.

팀과 팬들에 가까이 있을 겁니다. 맨유 팬분들께는 항상 감사했습니다. 이 환상적인 시간을 만들어주신 여러분께 감사드립니다. 계속해서 맨유는 응원할 것이고, 앞으로 더 많은 우승을 해낼 겁니다.

정말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