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마냐 마티치

특집 : 세르비아에서 맨체스터까지

볼이 펜스 밖으로 넘어가고, 모든 아이들이 멈췄다. 서로를 바라본다. 할 수 있는 건, 가위 바위 보 뿐이었다.

아무도 펜스 밖의 볼을 주으러 가고 싶지 않기 때문에, 이것이 유일한 방법이었다. 

아무도 묘지를 타고 올라가고 싶지 않을 것이다. 

그곳이 내 첫 축구장이었다. 세르비아에 있는 내 고향. 먼지나는 패치 옆에 묘지가 있었다. 바로 옆이었다. 풀도 전혀 없었고 땅은 너무 질거나 너무 말라 있었다. 비가 오는지 아닌지에 따라 많이 달라졌다. 하지만 배우는 것도 있었다. 어느 것에든지 기대해야 했다. 볼을 다른 아이에게 패스하면 볼이 가는 쪽으로 발을 댈 수 없었다. 그리고 이후 패스하는 걸 보았다. 볼이 어디로 가는지 지켜봤다. 항상 볼이 움직여야 했다. 볼이 어디로 튕겨 나갈지 모르기 때문이었다. 

우린 1500명 정도의 사람들이 사는 작은 마을에 살았다. 친구들도 많았고, 축구가 곧 생활이었다. 경기장 상태는 고려치 않았다. 그저 놀고, 축구하는 것 뿐이었다. 집에 돌아가면 눈만 보였다. 먼지를 뒤집어 썼기 때문이다. 

그게 생활이었다. 정말 행복했다.

축구는 내 가족들의 생활이었다. 아버지는 축구 선수셨다. 내 형도 그랬다. 형은 현재 APOEL 니코시아에서 뛰고 있다. 나도 축구선수였다. 내 아버지와 어머니는 나를 훈련장이나 경기에 데리고 다니셨다. 많은 시간을 할애했고, 그래서 아버지와 같은 길을 걷게 되었다. 아버지는 3년동안 내 코치였다. 7살부터 9살까지 말이다. 

정말 싫었다. 

악몽 같았다. 항상 어려웠다. 한 경기에서 5번의 득점을 했을 때도, 아버지는 내게 못했다고 말으니까! 아버지는 항상 패스를 내가 했건 안했건, 무엇을 했든 다른 것을 찾으라 했다. 다른 아이들은 괜찮았지만, 내게는 악몽 같았다. 내 형도 못한 게 아니었는데도, 항상 나에게 더 많은 것을 원했다. 항상. 

아버지가 내게 좋은 경기였다고 말한 적이 한 번 있었다! 유로파리그 준결승이었고, 벤피카와 페네르바체 경기였다. 경기 후 좋은 경기였다고 말씀해주셨다. 그게 처음이었고, 마지막이었다!

항상 왜 나에게 많은 것을 요구하는지에 대해 궁금했다. 하지만 이제와서 돌아보면, 왜 그랬는지 알겠고, 좋은 시간이었다고 생각한다. 7살의 나는 내 코치가 너무나도 싫었지만 말이다.

여전히 나는 학교보다 축구가 좋았다. 어리석다고 하지 말아줬으면 한다. 학교도 좋아했다. 친구들을 볼 수 있었으니까. 하지만 책을 읽을 때면, 내 마음은 축구나 농구에 가있었다. 교실 안에서 최고는 아니었지만 스포츠에 대해 생각하는 동안 충분했다고 생각한다. 

학교에 나가지 않는 날이면, 여름 방학 이라든가, 그럴 때면, 우린 돈이 없어서 아무데도 가지 못했다. 그렇다 할 일도 없었다. 당시에는 휴일에 대해 생각하지 못했다. 세르비아는 경제적으로 어려운 상황이었지만, 나는 행복했다. 여름에는 스포츠를 하며 시간을 보냈다. 축구, 농구, 발리볼을 했다. 나이에 맞추어 팀을 짜고 토너먼트도 했었다. 마을 단위로도 하고, 다른 마을과 겨루기도 했다. 여름 내내 우린 토너먼트를 했다. 

다른 지역 아이들이 우리 마을로 오면, 큰 경기기 치뤄졌다. 맨유와 파르티잔의 경기 같은 분위기였다. 우린 이겨야 했다. 그것이 우리의 자부심이었다. 우린 마을을 위해 뛰었다. 다른 팀이 우릴 이긴다는 건 인정할 수가 없었다!

10살이 되었을 대, 고향과 가까운 더 큰 클럽 중 하나의 코치가 나를 보았다. 경기 후 그가 내게 오더니 몇 살이냐고 물었다. 1988년 태어났다고 대답했다. 

“하, 아직 너 나이도 모르는구나.”

믿지 못했다. 내 플레이 방식을 말이다. 그는 내가 더 큰 선수인줄 알았다고 한다. 아버지를 알고 있는 사람들을 찾아 갔고, 우리 집 전화번호를 얻어서 아버지에게 내 나이를 물었다.

1988, 내 대답과 같았다.

그 코치는 유고슬라비아 최고의 유스 클럽 중 한 군데에 속하는 코치였으며, 토너먼트에 뛰는 것을 보았다고 아버지에게 말했고, 이 나라의 16개 클럽 중 최고의 클럽에서 뛰어야 한다고 전했다. 

아버지는 좋다고 했고, 나는 그렇게 떠났다. 우린 토너먼트에서 이겼고 유고슬로비아 내 최고의 유스 팀이 되었다. 나는 토너먼트의 선수로 선정되어 상도 받았다. 이후 레드 스타와 파르티잔이 내게 오라고 했고, 뛰었다. 

레드 스타를 선택했다. 4년을 거기에 있었고, 그들은 내게 충분히 잘하지 않는다고 전했다. 떠나는 것에 자유로웠다. 이미 벨그레이드에 있었고 학교에 적응해다. 또 다른 클럽을 찾아야 했다. 파르티잔이 내가 프리하다는 것을 듣고, 코치가 내게 오라고 했다. 그렇게 레드 스타에서 파르티잔으로 옮겨갔다. 

1년을 있었고, 거기서도 충분치 않다고 했다!

충분하지 않다는 말을 계속해서 들었을 때, 내가 무엇을 할 수 있었을까. 모두가 틀렸다는 걸 증명해야 했다. 

그래서 고향으로 돌아가 내 첫 클럽으로 갔다. 시간을 거기서 보내고, 18살이 되었을 때, 세르비안 3부 리그에 옮겨갔다. 6개원을 있었고, 1부 리그인 FC 코시체로 이적했다. 2년 반을 보내고, 첼시로, 벤피카로, 그리고 다시 첼시고, 이후 맨유로 옯겨갔다. 

어머니에게 감사함을 전하고 싶다. 어머니는 항상 내가 학교에 가길 원했고, 내가 운동을 하는 걸 좋아하지 않으셨다. 내가 처음으로 클럽에 합류하고 훈련에 임했을 때가 기억에 남는다. 선생님께 수업을 빼먹을 것 같다고 말했고, 축구를 위해 원정을 가야 한다고 전했다. 

선생님은 웃음을 터뜨렸다. “그래, 근데 부모님께도 말씀드리렴. 너 아직 아이야!” 쉽지 않은 대화였다. 어머니는 선생님께 말씀드려서 내가 학교에 가야한다고 말했고, 축구 때문에 수업에 빠져서는 안된다고 했다. 어머니는 거의 우셨다. 어려운 결정임에도, 나를 위해 그렇게 하셨다. 

감사함을 전하고 싶다. 내 커리어를 그렇게 꾸려나갈 수 있었다.

이번 시즌이 시작하기 전, 나는 여름을 Ub에서 보냈다. 내 생에 가장 긴 휴일을 보냈다. Ub의 가장 최고는 사람이다. 싱가포르, 중국, 다른 곳으로 투어를 갔을 때, 사람들은 우릴 볼 기회가 없다. 그래서 개인적으로 보는 것이 놀라웠다. 세르비아로 돌아가서 사람들은 이렇게 말했다. '네마냐 안녕, 잘 지내?' 일상적이고, 행복했다. 그곳에서는 나의 일상이 있었다. 아침에 일어나서 수영장에 아이들과 가고, 점심도 먹고. 오후에는 아들과 축구를 하기도 했다. 와이프와 레스토랑에 앉아서 아이들이 뛰어 노는 것도 보고, 사람들은 그곳에서의 나를 알고 있었다. 다른 사람들처럼 평범하게 지냈다. 

어릴적 친구들도 있었다. 저녁도 함께 하기도 했고 우린 결정했다. '클럽을 만들어서 밑바닥부터 시작하자.' 조기축구처럼. 첫 두 번의 시즌은 모든 경기에서 이겼다. 47번의 공식 경기가 있었고, 연속으로 승리했다. 세 번정도 진출했고, 이제는 4부에 있다. 리그 투와 동등한 거다. 지난 해 우린 8위로 마무리했고, 이제 앞으로의 우리가 기대되는 상황이다.

작은 클럽이고, 우린 세르비아 사람들이 외국 클럽을 응원하는 것처럼 세르비아 선수들을 응원하는 경향을 찾고 싶었다. 세르비아 사람들이 맨유를 응원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나 때문만이 아니라, 비디치 때문이기도 하다. 첼시도 응원한다. 나와 이바노비치 때문이다. 인터 밀란에는 스탠코비치가 있다. 아이였을 때도 같았다. 나는 항상 국가대표 팀 선수들을 응원했다. 세르비아에서 나는 레드 스타 벨그레이드를 응원했지만 세르비아 밖에서는 발렌시아를 응원했다. 내 아버지의 친구 미로슬라브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의 아들은 현재 맨체스터에 살고 있고, 나와도 좋은 친구다. 세상 잠 좁다!

세르비아로 돌아가는 것이 좋다. 하지만 아직까지 이상한 것이 있다. Ub에 내 이름을 딴 길이 있다. 처음에 들었을 때는 “어..어어...” 라고 답했고, 직접 보았을 때는 기분이 이상했다. 아직도 이해는 안간다. 

20년 또는 30년 후에 돌아보면, 이럴 것이다. '그래, 좋다' 하지만 지금은 이상하다. 물론 좋지만, 마을 사람들이 나를 좋게 생각해주어 자랑스럽기도 하다. 

묘지 펜스를 넘어오기까지 긴 이야기가 있었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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