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비
찰튼 경
- 출장758
- 총득점249
바비 찰튼 경보다 Manchester United의 가치를 높인 선수는 없습니다. 20세의 나이로 뮌헨의 끔찍한 사고에서 살아남은 그는 모든 경기를 사망한 동료들에게 바치듯 매 경기에 임했으며, 부상에서 회복하여 클럽과 국가를 모두 최정상에 올려놓았습니다.
United에서 17년 간 선수 생활을 하며 그는 754 경기에 출장해 247개의 골을 기록했습니다. 그의 기록은 아무도 깰 수 없을 것 같습니다. 뉴캐슬 유나이티드(Newcastle United)의 유명한 스트라이커 Jackie Milburn의 조카인 젊은 찰튼은 여러 클럽에서 몹시 탐을 낸 선수였지만 1954년 10월 United에서 프로에 입문했고 1954, 1955, 1956년에 FA Youth Cup을 수상했습니다. 그는 1956년 올드 트래포드에서 찰튼(Charlton)을 상대로 데뷔전을 치렀는데, 이 경기에서 즉각적으로 두각을 나타내며 부상에도 불구하고 두 골을 기록했습니다. "버스비 씨가 저더러 괜찮냐고 물어봤습니다."라고 바비 경은 회상했습니다. "저는 실제로 발목을 삐었지만 인정하고 싶지 않아서 손가락을 꼬며 '예'라고 대답했습니다." 눈부신 활약에도 불구하고 찰튼은 1956/57 시즌 후반부까지 비교적 규칙적으로 출장하지는 못했으며, 버스비 베이브스(Busby Babes)가 첫 타이틀을 따냈을 때 10골을 기록했습니다. 주전 경쟁이 매우 치열했지만 1958년 1월 볼튼 원더러스(Bolton Wanderers)와의 경기에서 해트 트릭을 기록하면서 그는 자신의 입지를 굳혔고, 버스비(Busby) 감독은 이젊고 힘이 넘치는 포워드를 빼면 경기를 하기가 더욱 어려워질 것이란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한 달 후 찰튼은 Partizan Belgrade와의 3-3 무승부 경기에서 두 골을 기록했고, 베이브스(Babes)는 유러피안 컵 준결승에 출전하게 되었습니다. 그 때 재앙이 그들을 덮쳤고 찰튼은 부상자 명단에 올랐습니다. 그러나 그의 부상은 비교적 경미했으므로 한 달 이내에 다시 경기에 나설 수 있었습니다. 찰튼은 뮌헨 사고 이후, 나머지 사이드가 재건되는 동안 필드 전반에서 그의 능력을 십분 발휘함으로써 팀의 재정비 과정에서 핵심적인 존재가 되었습니다. 처진 포워드(deep-lying forward)로 포지션을 영구적으로 전환하면서 그는 최고의 진가를 발휘했고, 1965년과 1967년 United가 리그 챔피언십에서 우승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이러한 성공은 잉글랜드 대표팀의 국제적인 영광으로 이어졌습니다. 1966년 월드컵 직전 찰튼은 Football Writers' Association Player of the Year로 선정되었고 곧 이어 European Footballer of the Year로 선정되었습니다. 그는 알프 램지(Alf Ramsey) 감독 아래서 뛰어난 활약을 보이며 우승을 이끌었고, 준결승에서 두 골을 기록하며 포르투갈을 물리쳤습니다. 찰튼은 A 매치 106 경기에 출전했고, 이 중 세 번 주장을 맡았으며, 통산 49골을 기록했는데 이는 아직도 잉글랜드 최고의 기록입니다. 월드컵 우승이 축구에서 얻을 수 있는 최고의 영예로 여겨지지만, 클럽차원에서 찰튼의 최고의 순간은 유러피안 컵에 United 주장으로 출전한 1968년 5월에 찾아왔습니다. 바비 경은 Wembley에서 벤피카(Benfica)를 상대로 4-1로 승리한 경기에서 두 골을 기록했습니다. 찰튼에게 이 승리는 뮌헨 사고 이후 팀 재건의 완성을 의미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경기 후 축하 파티에 참석하지 않고 대신 고인이 된 동료들을 생각하며 조용한 회상의 시간을 보냈습니다. 바비 경은 1973년 은퇴할 때까지, 역사상 가장 위대한 재능을 가진 세 명의 선수로 구성된 베스트-로-찰튼(Best-Law-Charlton) 3인 체제의 명성을 이어갔습니다. 그는 프레스톤 노스 엔드(Preston North End)에서 2년 간 선수 겸 감독으로 활동한 후 1975년 8월에 물러났습니다. 그는 1976년 아일랜드 공화국의 워터포드(Waterford)에서 잠시 선수 생활을 한 후 위건 애슬레틱(Wigan Athletic)의 이사직을 수락했고, 1982-83 시즌 동안 잠시 임시 감독직을 맡았습니다. 1984년 6월 찰튼은 Manchester United의 이사가 되었고 지금까지 그 직위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이미 OBE와 CBE를 수상한 그는 1994년 6월 바비 찰튼 경(Sir Bobby Charlton)으로 불리게 되었습니다. 자신의 팀과 잉글랜드 그리고 세계 축구를 위해 열심히 노력하는 존경 받는 축구 대사인 그는 클럽의 과거, 현재, 미래를 연결하는 대표적인 인물입니다.
Forward
English
1937년 10월 11일
1953년 6월 1일
1956년 10월 6일
찰튼 전(홈) 리그
1973년 5월 1일
오늘, 10월 21일은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상징이자 전설적인 인물인 보비 찰턴 경이 세상을 떠난 지 1년이 되는 날이다. 그는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와 세계 축구를 대표하는 인물로서, 클럽의 가치를 완벽하게 구현한 인물이었다.
1973년 이후 처음으로 조지 베스트, 데니스 로, 보비 찰턴 경의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유니폼이 새로운 박물관 전시를 통해 올드 트라포드에서 공개된다.
브라질의 신성 엔드릭은 토요일 웸블리에서 브라질 대표팀 소속으로 잉글랜드와 친선 경기에 출전해 자신의 사상 첫 국가대표 골을 넣은 후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전설 보비 찰턴 경에게 경의를 표했다.
수십 년의 시간이 흐르고 기억이 희미해지면서 66년 전 뮌헨에서 잃은 사람들을 기억하는 것이 그 어느 때보다 중요해졌다.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아이콘인 보비 찰턴 경의 삶은 월요일 밤에 열린 베스트 FIFA 풋볼 어워즈에서 또 다른 축구계 전설인 마리우 자갈로, 프란츠 베켄바워와 함께 애도와 찬사를 받았다.
현지시간 금요일, 잉글랜드와 말타의 유로 2024 예선에서 보비 찰턴 경을 향한 추모의 시간이 마련됐다.